평안과 행복은 우리에게 소극적인 역할 밖에 하지 못하지만, 괴로움은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가령 우리는 몸이 건강할 때는 몸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의식하지 않지만, 몸이 아프거나 병에 걸리게 되면 그 아픔을 느끼며 몸의 작은 반응 주시하며 주의를 기울인다. 즉, 우리에게 해롭고 악한것만이 그대로 실감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만이 적극성을 띈다. 이와는 달리 모든 바람직한 일과 행복과 만족은 소극적인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이제까지 느껴온 괴로움을 잠시 없애주는 순간적인 작용일 뿐이다.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기쁨은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못한것이 상례이며 이와 반대로 고통과 괴로움은 예상보다 더욱 큰 아픔을 주게 마련이다. (상례: 보통 있는 일)
모든 불행과 고통에 대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위안은 자기보다 더 불행하고 비참한 자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괴로움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은 시간이다. 인간은 오로지 현재에만 살고 있다. 현재는 불가불 과거 속으로 줄달음질쳐 사라지고, 오직 그 결과가 나중의 현재 속에 회상될 뿐이다. 또한 현재는 우리가 그때 그때 맞아 들이는 동안에 어느 새 도망쳐서 차례로 과거가 된다. 미래는 정확하지 못하며, 육신의 생리적인 활동 또한 시시각각 유예되고 연기된 죽음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으레 죽음이 승리를 차지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삶이란 죽음이 삼켜버리기 전에 노리개로 삼고 있는 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동물과 인간을 비교해보면 현재를 마음 편히 아무 걱정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동물이 매우 현명하다. 동물은 인간보다 훨씬 단순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식물의 경우에는 문자그대로 만족을 누리고있다. 그리고 동물의 생존에는 인간보다 훨씬 적은 고통과 즐거움이 따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한편으로는 불안과 거기에 따르는 괴로움을 모르고 살아가며, 참된 의미의 소망을 지니고 있지 않고, 머리속에서 즐거운 미래를 예상하거나 거기에 수반되는 상상을 통해 오는 축복의 환영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희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인간이 동물에게서 볼 수 없는 사고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 고락(즐거움과 고통)이라는 터전위에 행-불행이라는 높고 큰 건물을 세운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은 심한 갈등을 일으켜 때로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나중에 실제로 얻는 것은 동물이 소유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동물은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약간의 노고를 지불하면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쾌락보다 고통의 분량이 훨씬 많으며, 더구나 이것은 인간이 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몇 갑절 증대된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려 할 뿐,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며 따라서 마음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반면 인간은 항상 죽음을 내다보고 있다.
우리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모로 염려하면서 삶을 되도록 연장시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이 공중에 비눗방을 불며, 그것이 나중에 터질 것임을 알면서도 되도록 큼직하게 그리고 오래 가도록 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삶이란 단지 즐거움을 누리라고 우리에게 보내진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삶은 우리가 고역으로 갚아야 할 의무나 과업이다. 그러므로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거기에는 일반적인 불행, 그칠 줄 모르는 노고, 부단한 경쟁, 계속되는 투쟁, 신심을 다 기울이는 긴장속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활동이 있을 뿐이다. 삶의 번민과 실패와 노고와 두려움과 불안함의 중압이 없어진다면, 지나친 방종과 권태로 말미암아 송두리째 악의 구렁텅이로 끌려갈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나 다소의 걱정이나 고뇌, 또는 불행을 필요로 하는것이다. 이것은 마치 배가 바다 위에서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해 배에 무게를 주는 물체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노동, 가책, 괴로움, 궁핍, 불안과 두려움은 거의 누구에게나 평생 따라다니는 운명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모든 소원이 마음속에서 생기자마자 충족된다면 어떻게 될까?
누구나 원하는 여자를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누구나 먹고 싶은것 가지고 싶은 것을 쉽사리 단숨에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인간은 권태가 지겨워 숫제 죽어버리든가 싸움과 살인을 일삼아, 오늘날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보게될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라는 종족에게는 위에서 말한 고뇌와 번뇌의 세계가 살기에 적합한 고장이며, 그 밖의 어떤 다른 무대나 장소도 적합하지 못하다.
(인간의 삶은 궁핍과 권태로 양극을 이루고 있다. 번뇌와 권태는 곧 지옥과 천국의 다른 표현 아닐까?)
또한 용서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과 과오와 해악에 대하여 너그러워야 한다. 우리의 눈으로 보고있는 이 모든 사악함과 죄, 과오, 실수, 어리석음은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우매요 죄요 사악임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있는 이런 인간적인 결함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가 현재 분개를 금치못하는 타인의 악 역시 우리 자신 속에 깃들어 있음을 알게되면 우리는 너그러워지고 용서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유인만 생기면 타인이 저지르는 죄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악도 외부로 드러나게 마련임을 다시금 알아야한다.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1장. 삶의 괴로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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